동강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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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 백제시대 : 비사현 - 통일신라시대 : 백주현 - 고려시대 : 태강현 - 조선세종시대 : 흥양현 - 조선후기 흥양현 태강, 태동면에 해당 - 1914. 3. 1 : 행정구역 개편시 동면, 대강면, 보성군 남하면의 일부를 합하여 현 동강면을 이룸 - 1983. 2. 15 : 동강면 장도리가 보성군 벌교읍으로 편입 | ||
지역특성 | - 지리적 : 고흥군 최북단 평야지로 북고남저형의 지형 보성군과 경계를 이룸ㅊ - 역사적 : 유적비와 정려가 많아 충효의식 높음 | ||
행정구역 | 10개리 자연마을 33마을 | ||
지명유래 | |||
유둔리 |
원유둔 |
본래 흥양군 대강면의 지역으로 흥양 현감이 민정 시찰차 이곳을 지나다 물이 귀한 것을 보고 한곳을 파보라 하여 파보니 기름물이 유출되므로 그 샘을 기름샘 또는 지름보라 하여 마을 명을 유둔이라 하였다 함, 일설은 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냇물이 기름같이 맑다하여 유둔이라 불렀다 하는데 현 동강면의 소재지임. | |
계매 |
바닷가에 서식하는 개가 뫼를 파는 형국이라 하여 예로부터 「개뫼」라고 불림, 당초 유둔리 덕암마을에 편입되었으나 '89. 5월경 자연마을로 나뉘면서 桂)" 字와 梅 字를 써서 현재의 계매가 됨. | ||
덕암 |
유둔리에 속하며 예로부터 흥양에서 樂安(낙안)으로 통하는 대로변에 위치한 마을로서 東便에 柳竹나무로 놓은 다리가 있어 한때 村名을 가橋(가다리)라 칭하다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시 원래의 洞名인 德岩(덕암)으로 개칭함.? | ||
중촌 |
유둔리에 속한 마을로서 燈村(등촌)으로 불리기도 함, 마을과 마을 中間에 위치한다 하여 中村으로 呼稱했다 하기도 하고, 대강면 중앙에 위치한다 하여 中村이라고 불렀다는 由來가 있는데,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중촌으로 分洞하여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마륜리 |
마서 |
마륜리는 흥양군 대강면 지역으로 옛날 선비들이 말을 타고 出入하는 말발굽 소리가 수레바퀴처럼 끊임이 없었다 하여 馬輪(마륜)으로 불렀다 함. 1956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시 마륜리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馬西라 칭함. 동강면의 가장 서쪽 끝에 있는 마을로 대서면과 인접하고 있다. | |
덕촌 |
마륜리에 속한 마을로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德을 갖춘 마을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分洞과 함께 마을 이름을 德村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마동 |
마륜리에 속한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동, 마서, 원등을 합하여 馬輪里로 하였다가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시 마륜리의 동쪽에 위치한다하여 馬東이라 함. | ||
축내 |
李朝中葉 흥양현감과 관원들이 炭浦(탄포), 築內(축내), 斜只谷(사지곡)을 經由하는 도중 휴식처겸 飮馬池(음마지) 또는 旱害防止(한해방지)를 위해 이곳에다 6,000여평의 방죽을 築造하여 俗稱 「방죽안」이라 불리어 오다가 日帝때 蓮築內(연축내)로 改稱하였으나 1947년에 다시 마을 이름을 築內라 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원등 |
옛 태강현의 근처에 위치한 마을인데 종계산의 한 줄기가 뻗어 고흥반도를 形成한 원맥이 이곳에서 始發한 곳으로 부근에 院이 있었으며 등성이에 있다 하여 院嶝이라 이름하고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륜리에서 分洞된 이후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대강리 |
사서 |
泰江縣(태강현)의 大江里에 속한 마을로서 李朝高宗 32년 乙未改革으로 因하여 大江이라 稱하였으나 日帝때 옛 社倉이 이곳에 있어 社倉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社西라고 改稱하여 변동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사동 |
李朝高宗 32년 乙未改革으로 因하여 대강리에 속한 마을로서 이곳에 있었던 社倉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마을 명을 社東으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두산 |
斗傍山 아래 위치한 마을로서 옛날 연못에서 龍이 산으로 올라 등천했다하여 산 이름을 「용각산」이라 불렀고 이 용각산 등성이에는 용뿔이라는 삼각형 긴 바위 두 개가 서 있으며, 李朝英祖때 泰江을 斜橋里(사교리)라 칭하였으나 高宗 32년 을미개혁에 따라 泰江을 大江으로 改稱하고 본 마을은 斗傍山 중앙에 위치한다하여 斗山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평촌 |
대강리에 속한 마을인데 백제때 比史(비사), 신라때 柏州(백주), 고려때 泰江(태강)이라 칭하였는데 옛 태강현의 縣(현)터로서 李朝高宗 32년 乙未改革후 들 가운데 위치한다 하여 「샘밭」이라 불리어 오다가 日帝때 행정구역 개편당시 평탄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坪村으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매곡리 |
당곡 |
매곡리에 속한 마을로서 李朝中葉 이전까지는 마을 명을 「땅골」이라 불렀으며 그후 棠谷이라고 命名한 뒤 변동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쌍암 |
昇平朴氏 비문에 의하면 서기 1636년 李朝仁祖 병자호란 당시에는 마을이름을 九都洞이라 칭하였고 그후 貴德골이라 부르다가 별칭 귀뚝골이라 하였으나, 순조(1880년)때 마을뒤 큰 연못가에 큰바위 두 개가 있어 그 바위에서 낚시질을 하였다고 하여 쌍암이라 칭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 ||
신정 |
서북쪽으로 智萊山(일명 병풍산)이 감싸고 있는 梅谷里에 속한 마을이며, 마을 地形이 舟形이라 하여 배에는 돛대신 수목이 있어야 마을이 번창한다는 뜻으로 宋晟(송성)의 후손 宋格(송격)이 마을남쪽에 정자나무를 심어 新亭이라 불렀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원매곡 |
본 마을의 뒷산은 飛鳥岩(비조암)과 屛風山(병풍산)이 主山을 이루고 東北간에 名山인 尖山(첨산)이 솟아 梅花落地(매화락지)라는 명당이 있어 첨산아래 村落(촌락)을 이루어 한때 尖山洞이라 부르다가 뒷산 주변에 매화가 만발하므로 원매곡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한천리 |
신촌 |
옛날 東西南北風이 잘 닿는 곳에 새 터를 잡아 마을이 생겼다하여 「샛터」라 불러오다가 일제때 新村으로 改稱하였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변동 없이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택촌 |
원래 設村당시 연못을 발견하고 定着하였는데 물이 좋고 못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때부터 澤田(택전)이라 불러왔으며, 또 찬물 水源이 많아 寒泉이라고 했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시 집"宅"자로 바꾸어 宅村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운동 |
西出東流의 옹달샘 물이 좋아 한때 水洞이라 불러왔으며 宋, 鄭, 李氏 등이 새 터를 잡아 設村 할 때는 修道할 곳을 뜻하여 修洞이라 칭하다가 비조암이 있는 산 일대에 구름이 많이 끼므로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시 雲洞으로 개칭하여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오월리 |
세곡 |
지금으로부터 약 180여년전에 金海金氏들이 살고 있었고 村名을 곰머리로 불렀다. 右便에 새?, 左便에 다래기라는 마을이 있다.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새?을 仙芝, 다래기를 月岳, 곰머리를 細谷이라 호칭하면서 三村을 合하여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현재 細谷이라 부르고 있다. | |
내대 |
원래는 마을뒷산이 소가 누워있는 地形이라 하여 "臥牛(와우)"로 칭하고 마을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기 때문에 "백이실" 도는 碧溪(벽계)"라 불렀으나 옛날 바다에서 보면 안에 이나가 있고 정자나무가 서 있어 안터라고 하였으며, 같은 뜻의 한자로 "內垈(내대)"라 칭하여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시 분동 되면서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오수 |
원래 오월리에 속한 마을로서 옛날 老僧(노승)이 이 마을에 쉬어가면서 앞산을 바라보고 지형이 "비오닥지"형이므로 島(도)를 梧(오)로 고치라고 하여 梧樹(오수)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分洞되면서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청송리 |
상송 |
이조시대 純宗祖말까지 "솔메등"으로 불러오다가 마을주위에 무성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初代面長 姜舞永(강무영)이 마을 명을 靑松(청송)이라 개칭하였고,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청송리의 위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上松(상송)이라 칭하고 변동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하송 |
청송리의 아래쪽에 위치한다 하여 下松(하송)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죽암리 |
죽림 |
원래 죽암리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 앞이 강변이므로 모래가 많이 밀려왔으므로 옛날 마을 명을 “모리목”이라 불러 왔으나 일제초기에 마을전체가 대나무로 울창하므로 竹林(죽림)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죽동 |
죽암리에 속한 마을로서 먼 옛날에는 동내전체가 竹林으로 우거졌다 하나 마을 명을 한때는 “모랫등목넘개“라 불렀고 또 시누대가 많아 ”신죽“이라고도 하였으며 그후 일제시대에 竹洞(죽동)으로 개칭하여 변동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옹암 |
죽암리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연안으로 접한 浦口(포구) 남쪽에 바위로 이루어진 山이 마치 홀로 서 있는 形態(형태)라 하여 獨岩(독암)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일제때 제방을 막아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전경이 항아리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마을 명을 옹암이라 칭하여 1956년 분동이래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장덕리 |
관덕 |
장덕리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의 지형이 풍수지리상 寶劍出甲(보검출갑)의 지형으로서 「보배로운 칼이 칼집에서 나왔으므로 덕을 본다」는 뜻에서 觀德(관덕)이라 이름하였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分洞되면서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장동 |
본 마을은 관덕 위쪽에 있으므로 웃뜸이라고 하였고 그전에 옹기점이 있어 점촌이라 하였으나 이곳 지형이 노루처럼 생겨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윗등을 母獐燈(모장등)이라 하며 건너편에 새끼노루가 어미를 돌아보는 山이라 하여 이 산을 幼獐顧母山(유장고모산)이라 불러 人倫의 情을 상징하였으며, 마을 터를 “노루골”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음차하여 獐洞(장동)으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장월 |
마을지형이 반달모양으로 되어 있어 “장달”이라 부른 것이 “장다리”로 바뀌었다하며 마을밖에 수백년된 河川에 “장다리”라 하는 木橋가 있어 마을 명을 한자로 長橋(장교)라 칭하여 오다가 고종말기 1815년부터 掌月(장월)이라 개칭하여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시 분동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노동리 |
병동 |
옛날 풍수지리설에 左靑龍 右白虎嶝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 “골안”이라 불렸으며 또 금반옥지의 玉이 마지막 山 끝에 뻗었다고 하여 山勢를 보아 玉山이란 마을이 생겼고 元屛洞(원병동)은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있어 이조말기부터 屛風山의 정기 받은 마을이라 하여 원병동과 옥산 마을을 합하여 “병동”으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죽산 |
이조시대 仁祖때(1630)까지는 岱山(대산)으로 불러왔으나 그후로는 마을에 대나무가 무성하여 마을 명을 竹山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출처 : 재부고흥군향우회
글쓴이 : 김 윤 석 (등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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