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고시리(古侍里)의 지명은 고방동(古房洞)마을의 고(古)자와 어시리(於侍里)마을의 시(侍)자를 각각 취하여 고시리로 하였다.
고시리는 고방동마을, 샛점마을, 터건너마을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고방동마을의 뜻은 마을 형세가 풍수지리상 창고와 같다하여 고방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마을은 폐촌되고 안식교회 미스바 야영장 건물이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능주목(綾州牧) 동면(東面) 고방동리(古房洞里)로 기록되어 있으며 1867년 대동지지에는 능주목 운룡면(雲龍面),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능주군(綾州郡) 한천면(寒泉面) 고방동(古方洞)으로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화순군(和順郡) 한천면 고시리(고방동, 어시리)에 편입되었다. 터안마을가 함께 1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이 거주할 때는 50여호가 거주하였다.
●주산물(쌀,보리), 특산물(한봉, 표고버섯), 주소득원( )
●성씨 : 이천徐, 의성金, 회진任
●마을형성
고방동마을은 남쪽으로 가면 두봉산과 장재봉이 있으며 장재너머에 보성땅이 있고 마을 북쪽으로 고시제 저수지가 있다. 마을의 동쪽은 형제봉이 있고 서쪽은 촛대봉 지맥이 뻗어있다.
마을방향은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임씨, 장씨가 안골 앞에서 움막을 치고 처음 거주하였다고 전한다.
회진임씨가 임진왜란시 피난하여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의성김씨, 밀양박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전한다.
1825년경 아산장씨 蔣섭(1804∼1876)이 신풍면 청룡리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1910년경 여흥민씨 閔文植(1890∼1948)이 차리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주민들은 1950년 6·25이후 소개되어 피난하였다가 동가리 동산마을에 새터를 잡고 거주하게 되었다.
동쪽으로는보성군 복내면, 서쪽으로는 샛점마을, 남쪽으로는 이양면, 북쪽으로는 동가리 동산촌 마을에 접하고 있다.
●유물 ·유적
고시제 저수지(1970년 축조), 안식교회 미스바수련장
●민속놀이. 전설. 민담
⊙ 영을 넘고 영을 넘은 저구름가는 곳은
산중에 당도한 정처없는 저 나그네
숲에서 잠이드니 꿈속에 나타난 신선님
이곳이 복지로다하며 간데없고
꿈을깨어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니
한천 4개 고터중 하나일세
⊙ 당산제 : 정월 대보름이면 할머니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 농악 :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굿, 시암굿, 마당볼비를 하였다.
⊙ 디딜방아 액막이 : 하지 않았다.
⊙ 기우제 : 지내지 않았다.
⊙ 당산점 : 당산나무 잎이 한번에 피면 풍년이 들고 나뉘어 피면 가뭄이 든다고 하였다.
⊙ 짐대 : 짐재거리에 정월 대보름이면 세웠는데 할아버지 당산 대신에 만들어 세웠다.
⊙ 줄다리기 : 정월 대보름이면 남여로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였다.
⊙ 역대이장 : 보성양반, 장채문, 박용기, 장상규, 민병호가 이장을 지냈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 김두지라는 사람이 살아서 마을이름을 고방동이라 했다고 전한다.
⊙ 두봉산(斗峰山) : 고방동에서 남쪽으로 1㎞ 지점에 위치란 630m의 산으로 말봉산이라 하기도하며 어시동에 살던 어씨가 망을 보았다하여 망망산이라 하였는데 와전되어 말봉산이라 한다고 한다.
⊙ 산중만인곡창지형(山中萬人穀倉之形) :이곳에 사는 부자가 주변에 소작을 주었는데 동산 앞은 물론 남면까지도 소유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 형제봉 : 고방동 동쪽으로 두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있는데 이를 형제봉이라 한다.
⊙ 장재봉 : 고방동 동남쪽으로 보성군과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 복내장을 짱재를 통하여 다녔다.
⊙ 산, 등 : 두봉산, 장재봉, 형제봉, 도치뱅이, 관챙이, 중께산
⊙ 고개 : 짱재(∼보성 복내)
⊙ 바위 : 괴바위, 호랭이대그박 바위
⊙ 골짝 : 성적골, 큰관챙이(큰골, 작은골), 작은관챙이, 새암골, 건넝굴, 안골, 도치뱅이골, 재굴, 삼밭굴, 사그점굴, 섯밭굴, 질굴, 가운데골, 모싯굴, 꾑남굴, 곰실, 채정자골
⊙ 길 : 대판이, 합수거리, 돌고개
⊙ 논 : 장구배미, 말배미, 정재건너
⊙ 밭 : 꾑남굴밭, 뒷등밭
⊙ 보 : 짐대거리보, 당산보, 중대산이보, 아그담보
⊙ 샘 : 동네시암(들가운데)
⊙ 터 : 숯굿터, 독삼굿터, 양씨재각터
⊙ 길 : 짐대거리